이 기록관의 중심 인물이다.
1894년 영덕군 창수면 신리에서 태어나 잡화상을 하며 마을 일을 보던 사람이, 1919년
3월 19일 주민을 이끌고 창수면 주재소 앞으로 나갔다. 그해 6월 1심에서 징역 4년,
9월 항소심에서 원판결 취소 후 다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출옥한 뒤에는 마을에 학교를 세우는 일에 두 번 이름을 올렸다.
1928년 4월 27일자 조선일보 4면은 영덕군 창수면 동창학교의 설립 경위를 전하면서
金潤德·金舜兆·林學烈·李鉉卨 네 사람을 발기인으로 적고, 기사 말미 직원 명단의
敎監兼財務 자리에 林學烈과 나란히 그의 이름을 다시 적었다. 학교는 그해 4월
5일 개학했고 학생은 약 50명이었다. 발기인이자 교감 겸 재무, 두 자리가 지면 한 장
안에 함께 있다.
→ CLM-006 · DOC-006
그 학원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0년 3월 25일 졸업·수료식까지는 운영되고 있었으나,
1931년 9월 7일자 조선일보 4면의 폐쇄 사립학원 목록에 창수의 동창학원이 올라 있다.
정확한 폐쇄일은 확인되지 않았다.
→ CLM-021 · CLM-008
일곱 해 뒤, 1935년 5월 8일자 조선일보 6면 「普校基金完納」은 창수공립보통학교
설립위원회가 기본금 3,700원을 한 달이 안 되어 완납했다고 전하며 위원 명단에
李鉉卨을 적었다. 회장 李洛鉉, 부회장 李謙浩, 위원 가운데 權泰鎬가 함께
있고 두 이름은 지면 훼손으로 판독되지 않는다. 이 학교는 동창학교와 별개이며,
학교 공식 연혁은 1935년 9월 25일 인가·10월 8일 개교를 적는다.
→ CLM-007 · CLM-028 · DOC-007
같은 1935년, 그해 5월의 부·읍·면 의원 선거 당선자 명단에도 이름이 실렸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5월 25일자 3면 4단과 매일신보 같은 해 6월 1일자 3면 1단이 영덕군 창수면 당선자
가운데 李鉉卨을 적었다. 서로 다른 신문 두 종의 동시대 명단으로 교차확인되는 사실이다.
→ CLM-026 · DOC-025 · DOC-026
당선 사실은 여기까지 확인되었고, 언제까지 그 직에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기록관은 임기와 퇴임 시점을 적지 않으며, 직함 하나에서 그 사람의 행위를 추론하지도
않는다. 제도의 성격과 개인의 구체적 행위는 각각 따로 검증할 대상이다.
유족에게는 그가 학교를 세우기 위해 전략적으로 면협의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학교 건립 관여와 공직 진출이라는 두 사실은 위와 같이 동시대 신문으로 각각
확정되지만, 그 둘을 잇는 동기의 인과를 적어 둔 문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문장만 가족 제공정보로 남겨 둔다.
→ CLM-029 · DOC-028
1952년 5월 24일 세상을 떠났고, 1968년 대통령표창과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뒤따랐다.
남은 것은 문서다. 얼굴은 아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