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M-001 · 1919년 3월 19일
이현설 李鉉卨 1894 — 1952
1919년 3월 19일,
창수의 독립을 외치다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에서 태어나 잡화상을 하며 마을 일을 보던 사람이, 1919년 3월 19일 신리 주민을 이끌고 창수면 만세시위에 나섰습니다. 그해 6월 1심에서 징역 4년, 9월 항소심에서 원판결 취소 후 다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출옥 뒤에는 동창학교를 비롯한 지역 교육활동에 힘썼습니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습니다.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 1919-09-30 · 국가기록원 CJA0001284
생애
전체 연표 →-
이현설은 1894년 6월 15일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에서 태어났다.
공식 후대기록
-
이현설은 잡화상을 운영했고 신리의 동장·구장을 맡았다.
공식 후대기록
-
이현설은 1919년 3월 19일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에서 신리 주민을 이끌고 만세시위에 참가·지휘했다.
확정
-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은 원판결을 취소하고 이현설에게 다시 징역 4년을 선고했다.
확정
-
1928년 4월 5일 영덕군 창수면에 동창학교가 문을 열었고, 이현설은 교감 겸 재무로 참여했다.
확정
-
1935년 이현설은 창수면 보통학교 설립 기금 모금위원으로 활동했다.
확정
-
공식 후대기록
-
공식 후대기록
-
이현설은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공식 후대기록
이 기록관의 모든 문장에는 검증등급이 붙습니다. 등급 체계는 검증방법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생애를 이어서 읽기 →
창수 3·1운동과 재판
자세히 →1919년 3월, 만세시위는 서울에서 시작해 지방으로 번져 갔습니다. 영덕군 창수면에서는 3월 19일에 시위가 일어났고, 이현설은 신리 주민을 이끌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확정하는 것은 후손의 기억이 아니라 재판 기록입니다.
CLM-002 · 1919년 6월 5일
이현설은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1심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CLM-003 · 1919년 9월 30일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은 원판결을 취소하고 이현설에게 다시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시대 배경사진 · 이현설 선생 아님
이현설 선생 또는 가족과 직접 관련 없는 시대 배경사진. 1919년 만세운동기 서울의 군중을 담은 흑백 도판. 창수면이 아니라 서울에서 촬영된 것으로 전해진다.
출처: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Gallica), ark:/12148/bpt6k96806061 /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 원출처 보기
원본 SHA-256 20a95e12eaf4dff46a9e71e76b787b630bbc75d0e9d48381847e0af872d85a28
출처
- 자료
- 1919년 서울 만세시위 군중 사진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간행물 도판) 생산자 촬영자 미상 · 수록 간행물 『L'Indépendance de la Corée et la Paix』 생산일 1919년 — 촬영 시점은 1919년 만세운동기로 전해지며, 정확한 날짜·장소는 원간행물 캡션 범위를 넘어선다. 소장처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Gallica) 식별번호 ark:/12148/bpt6k96806061 원문 링크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96806061
- 이용조건
- 웹 게시 게시 가능 — 퍼블릭 도메인 자료로 Wikimedia Commons를 통해 공개되어 있다. 이 사이트는 크레딧과 원출처 링크를 화면에 함께 표시하고, 고정 캡션 없이는 표시하지 않는다. 이용조건 Public Domain
자료 레코드 DOC-018 상세 보기 · 검증등급 확정 · 최종 검토 2026-08-19
이현설 선생이 나선 곳은 서울이 아니라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이었습니다. 그날 창수면 주재소 앞을 담은 사진은 확인되지 않았고, 이 기록관이 그날에 관해 아는 것은 전부 판결문에서 나옵니다. 재판과 수형 →
출옥 이후
교육활동 →-
1928 — 1935 · 교육활동
마을에 학교를 세우는 일
1928년 4월 동창학교 개교와 함께 교감 겸 재무를 맡았고, 1935년에는 창수면 보통학교 설립 기금 모금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사람이 두 번 학교 일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모두 동시대 신문 보도로 확정되는 사실입니다.
-
가계 · 검증 중
가족과 선친
부친 이수철, 이수각과의 형제관계, 재령이씨 석계공파 소속은 현재 가족이 제공한 정보이며 제적부·족보 원면 대조 전입니다. 이 기록관은 가족의 기억과 문서로 입증된 사실을 섞어 쓰지 않습니다.
-
1968 · 1991 · 포상
사후의 포상
1968년 3월 1일 대통령표창,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 사망으로부터 각각 16년과 39년 뒤의 일입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과 정부 상훈 공개DB에서 누구나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근거 자료
자료 목록 →DOC-001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1919년 형공 제1284호 편철)
1919년 3월 영덕 창수면 만세시위 관련 항소심 판결문 편철. 원판결을 취소하고 이현설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사이트에서 확정으로 표시한 1919년 사실관계의 핵심 근거다.
DOC-002 ·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판결문 및 신문조서 (1919년 형공 제749호 편철)
창수면 만세시위 1심 판결문과 관련 신문조서가 함께 편철된 자료. 복수 피고인의 진술로 1919년 3월 19일 당일의 행동을 복원할 수 있다.
DOC-006 · 신문
조선일보 1928년 4월 27일자 4면 — 동창학교 개교 기사
1928년 4월 5일 영덕군 창수면에 동창학교가 문을 열었고 이현설이 교감 겸 재무로 참여했다는 동시대 신문 보도. 출옥 이후 교육활동을 확정하는 근거다.
DOC-009 · 공공DB
대한민국 상훈 공개DB — 이현설 건국훈장 애국장 기록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 포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정부 공개 데이터베이스 기록.
저작권과 게시허가가 확인되지 않은 자료는 원문을 공개하지 않고 서지사항과 소장처만 표시합니다. 누구나 같은 절차로 원자료를 직접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기록관의 원칙입니다. 권리 정책 →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
검증방법 →CLM-011
이현설의 실제 출옥일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CLM-018
이수철이 의병 활동에 참여했으며 신돌석 의진에 속했다.
CLM-014
이현설의 얼굴이 담긴 사진은 2026년 8월 19일 현재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는 일도 기록관의 몫입니다. 공개된 검색 도구로 찾지 못한 자료는 공개색인 미발견이라고 쓰고, 자료가 없다고 쓰지 않습니다.
조사일지
전체 보기 →-
제3화 · 2026년 8월 19일
제3화 — 그 사진의 이름은 李鉉禹였다
우리는 사진을 찾았다고 믿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지면을 직접 촬영해 그 판단을 철회했다. 캡션의 이름은 李鉉禹였다.
-
제2화 · 2026년 8월 19일
제2화 — 감옥에 사진이 남아 있을 것이다
수용자신분장과 감시대상인물카드. 가장 그럴듯한 가설이 어디에서 멈춰 섰는지에 대한 기록.
-
제1화 · 2026년 8월 19일
제1화 — 판결문에서 시작하다
가족에게 남은 것은 이름과 몇 개의 날짜뿐이었다. 조사는 국가기록원 편철 안의 한 문장에서 시작됐다.
자료를 확인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연재로 남깁니다.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은 기록도 지우지 않고 정정기록에 보존합니다.
조사 참여
제보 안내 →영덕 창수와 신리, 재령이씨 문중, 동창학교와 창수보통학교, 1968년과 1991년 포상 관련 자료를 찾습니다. 족보, 편지, 장례 기록, 학교 단체사진, 마을 행사 사진, 그리고 사진 자료 모두 이 기록을 채우는 단서가 됩니다.
제보만으로 인물이나 사실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공개 전에 반드시 제보자의 동의와 자료 검증을 거치며, 민감정보가 담긴 자료는 가린 사본으로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