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1894년 신리에서 1952년까지

가게를 하고 마을 일을 보던 사람이 1919년 3월에 주재소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 뒤 4년형과 감옥, 그리고 마을에 학교를 세우는 일이 이어집니다. 아래 서술은 모두 등급이 붙은 개별 주장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태어난 곳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 후대 국가기록은 출생일을 1894년 6월 15일로 적습니다. 이 날짜는 1919년 형사 장부의 연령 기재(26세)와 정합합니다. 동시대 호적·제적 원면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이 사이트는 이 항목을 공식 후대기록 으로 표시합니다.

일하던 사람

지역 편찬물 『창수면지』는 그가 잡화상을 운영했고 신리의 동장·구장을 맡았다고 기록합니다. 동시대 자료로는 아직 교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 대목이 중요한 이유는, 1919년 3월에 주민을 이끌 수 있었던 사람의 지역 내 위치를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1919년 3월 19일

이 하루가 이 기록관의 중심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창수 3·1운동 페이지에 있습니다. 판결문 두 편철과 형사사건부가 이날의 행동과 그 결과를 확정합니다.

감옥과 그 이후의 공백

1919년 9월 30일 항소심에서 징역 4년이 확정된 뒤, 이 사이트가 다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1928년 4월의 신문 기사입니다. 그 사이 약 9년의 시간에 관해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모릅니다. 출옥일조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세우는 일 — 두 학교, 두 연도

조선일보 1928년 4월 27일자 4면 「盈德蒼水面 東昌學校設立」은 창수면 유지 金潤德 · 金舜兆 · 林學烈 · 李鉉卨 네 사람의 발기로 사립학교설립기성회가 조직되어 학교가 세워졌다고 적고, 기사 말미 직원 명단의 敎監兼財務 자리에 그의 이름을 다시 적었습니다. 1928년 4월 5일 개학, 학생 약 50명. 한 지면 안에 이름이 두 번 있습니다. 확정 → CLM-006

그 학원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30년 3월 25일 졸업·수료식까지는 운영되고 있었으나, 1931년 9월 7일자 지면의 폐쇄 사립학원 목록에 창수의 동창학원이 올라 있습니다. 폐쇄 시점은 그 사이로 좁혀지고 정확한 날짜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확정 → CLM-021 · CLM-008

일곱 해 뒤인 1935년 5월 8일자 6면 「普校基金完納」은 창수공립보통학교 설립위원회가 기본금 3,700원을 한 달이 안 되어 완납했다고 전하며 위원 명단에 李鉉卨을 적었습니다. 이 학교는 동창학교와 별개의 학교이며, 학교 공식 연혁은 1935년 9월 25일 인가·10월 8일 개교를 적습니다. 확정 → CLM-007 · CLM-028

후대 지역 편찬물은 같은 이름의 학원을 1935년 설립·1938년 폐쇄로 적어 동시대 신문과 일곱 해가 어긋납니다. 이 사이트는 동시대 지면을 연표로 삼고 후대 서술을 지우지 않은 채 충돌로 기록합니다. 확정 → CLM-027

자세한 내용은 교육활동과 조사일지 제6화에 있습니다.

1935년 — 창수면 면협의원 당선

같은 1935년, 그해 5월에 실시된 부·읍·면 의원 선거의 당선자 명단에도 이름이 실렸습니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5월 25일자 3면 4단 「府邑面當選議員 : 盈德郡各面協議員」이 영덕군 각 면 협의원 가운데 창수면 당선자 열 사람을 적었고, 그 안에 李鉉卨이 있습니다. 엿새 뒤 매일신보 1935년 6월 1일자 3면 1단 「慶尙北道」가 같은 선거의 당선자를 다시 실으면서 창수면 항목에 같은 이름을 적었습니다. 발행 주체가 다른 두 신문의 동시대 명단이 교차확인해 주므로 이 항목은 확정 입니다. → CLM-026

가족에게는 "일제 말기에 면협의원을 지내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습니다. 그 기억은 단서였고, 이번에 시점이 1935년 5월로 정밀해졌습니다. 다만 언제까지 그 직에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이트는 임기와 퇴임 시점을 적지 않고, 1945년 직전까지 재임했다고 쓰지 않습니다.

직함 하나에서 그 사람의 행위를 추론하지도 않습니다. 식민지기 면협의회라는 제도의 성격과 한 개인의 구체적 행위는 각각 자기 자료로 확인되어야 할 별개의 문제입니다. 지금 확정된 것은 당선자 명단에 이름이 실려 있다는 사실이며, 협의회 회의록과 행정기록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유족에게는 그가 학교를 세우기 위해 전략적으로 면협의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학교 건립 관여와 공직 진출이라는 두 사실은 동시대 신문으로 각각 확정되지만, 그 둘을 잇는 동기의 인과를 적어 둔 문서는 확인되지 않았고 반증하는 문서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문장만 등급을 낮춰 남깁니다. 가족 제공정보 → CLM-029

1952년, 그리고 그 뒤

1952년 5월 24일 사망. 사망 장소와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고, 같은 날짜를 뒷받침할 동시대 부고나 장례 기사는 공개색인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전쟁 중이었고 지역 신문의 결호도 많습니다.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1968년 3월 1일 대통령표창,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뒤따랐습니다. 사망 16년, 39년 뒤의 일입니다.

1935년 당선을 확정하는 자료

자료 목록 →
  • DOC-025 · 신문 · 동시대 신문

    조선중앙일보 1935년 5월 25일자 3면 4단 — 「府邑面當選議員 : 盈德郡各面協議員」

    1935년 5월 실시된 부·읍·면 의원 선거의 당선자를 지역별로 열거한 명단 기사. 영덕군 각 면 협의원 항목 가운데 창수면 당선자 열 사람의 이름이 실려 있고 그 안에 李鉉卨이 있다. 이현설의 1935년 창수면 면협의원 당선을 확정하는 동시대 신문 기록이다.

    생산
    조선중앙일보사 (사장 여운형) · 1935년 5월 25일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식별번호
    3면 4단 · 콘텐츠 ID CNTS-00093591367
    링크
    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3591367
    이용조건
    지면 스캔의 재게시 권리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 사이트는 기사 스캔 이미지를 게시하지 않고, 날짜·면수·기사명·콘텐츠 ID와 국립중앙도서관 원문 링크만 제공한다. 원 지면은 위 링크에서 누구나 직접 열람할 수 있다.

    확정 게시허가 확인 중 자료 레코드 상세

  • DOC-026 · 신문 · 동시대 신문

    매일신보 1935년 6월 1일자 3면 1단 — 「慶尙北道」 부·읍·면 의원 당선자 명단

    경상북도의 부·읍·면 의원 당선자를 군·면별로 열거한 명단 기사. 영덕군 각 면 당선자 가운데 창수면 항목이 있고 그 안에 李鉉卨이 다시 등재되어 있다. 발행 주체가 다른 신문의 같은 명단이므로, 조선중앙일보 1935년 5월 25일자(DOC-025)와 함께 이현설의 창수면 면협의원 당선을 교차확인한다.

    생산
    매일신보사 · 1935년 6월 1일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식별번호
    3면 1단 · 콘텐츠 ID CNTS-00094704584
    링크
    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4704584
    이용조건
    지면 스캔의 재게시 권리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 사이트는 기사 스캔 이미지를 게시하지 않고, 날짜·면수·기사명·콘텐츠 ID와 국립중앙도서관 원문 링크만 제공한다. 원 지면은 위 링크에서 누구나 직접 열람할 수 있다.

    확정 게시허가 확인 중 자료 레코드 상세

두 기사 모두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에서 제공하는 지면입니다. 스캔 이미지의 재게시 권리를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이 사이트는 지면 이미지를 게시하지 않고 날짜·면수·기사명·콘텐츠 ID와 원문 링크만 표시합니다. 두 기사는 이름을 열거한 명단 기사이며, 현재 확인된 메타데이터 범위에서 인물사진이 실렸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생애 주장 일람

연표로 보기 →
생애 관련 주장과 검증등급
시점 주장 등급
1894년 6월 15일 이현설은 1894년 6월 15일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에서 태어났다. 공식 후대기록
— 이현설은 잡화상을 운영했고 신리의 동장·구장을 맡았다. 공식 후대기록
1919년 1919년 당시 이현설의 주소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동이었다. 확정
1919년 3월 19일 이현설은 1919년 3월 19일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에서 신리 주민을 이끌고 만세시위에 참가·지휘했다. 확정
1919년 6월 5일 이현설은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1심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확정
1919년 9월 30일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은 원판결을 취소하고 이현설에게 다시 징역 4년을 선고했다. 확정
1920년 4월 28일 이현설은 1920년 4월 28일 칙령 제120호 일반감형의 적용 대상에 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유력
— 이현설의 실제 출옥일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미확정
1928년 4월 5일 1928년 4월 5일 영덕군 창수면에 동창학교가 개학했고, 이현설은 설립 발기인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자 교감 겸 재무였다. 확정
1930년 3월 25일 1930년 3월 25일 창수 동창학원의 졸업·수료식이 열렸고, 학원은 적어도 그날까지 운영되고 있었다. 확정
1931년 9월 7일 창수 동창학원은 1930년 3월 25일 이후 늦어도 1931년 9월 7일 이전에 폐쇄되었다. 확정
1935년 5월 8일 1935년 5월 이현설은 창수공립보통학교 설립위원회 위원으로 이름이 실렸고, 그 위원회는 기본금 3,700원을 한 달이 안 되어 완납했다. 확정
1935년 10월 8일 창수공립보통학교는 1935년 9월 25일 설립인가를 받아 같은 해 10월 8일 개교했다. 공식 후대기록
1935년 5월 25일 이현설은 1935년 영덕군 창수면 면협의원 당선자로 두 종의 동시대 신문 명단에 등재되어 있다. 확정
— 이현설은 학교를 세우기 위해 전략적으로 창수면 협의원이 되었다. 가족 제공정보
— 동창학원의 설립·폐쇄 연대에 관해 후대 지역 편찬물과 동시대 신문의 기록이 서로 어긋난다. 확정
1952년 5월 24일 이현설은 1952년 5월 24일에 사망했다. 공식 후대기록
1968년 3월 1일 이현설은 1968년 3월 1일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공식 후대기록
1991년 8월 15일 이현설은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공식 후대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