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기억에서 시작한다
제5화에서 우리는 가족에게 전해지던 ‘면협의원’ 이야기의 시점을 1935년 5월로 확인했습니다. 그 기록을 정리하는 자리에서 유족이 한 문장을 더 전했습니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전략적으로 면협의원이 되셨다고 들었다.
이 기록관은 이런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지 않습니다. 대신 그 문장을 쪼갭니다.
| 구술의 부분 | 물어야 할 것 |
|---|---|
| 학교를 세웠다 | 어느 학교인가. 언제인가. 어떤 자리였나 |
| 면협의원이 되었다 | 이미 확인됨 — 1935년 5월 |
| 세우기 위해 되었다 | 동기다. 문서가 가장 적게 남기는 종류의 사실 |
앞의 두 개는 문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아마 어렵습니다. 이번 화는 앞의 두 개를 따라간 기록입니다.
첫 번째 지면 — 1928년 4월 27일
조선일보 1928년 4월 27일자 4면, 盈德蒼水面 東昌學校設立, 부제 校舍도建築. 기사 ID는 274719280427e1047입니다.
기사는 창수면의 교육 형편을 개탄하던 동면 유지들의 이름부터 적습니다.
金潤德 · 金舜兆 · 林學烈 · 李鉉卨
네 사람의 발기로 수년 전부터 私立學校設立期成會가 조직되어 활동했고, 그 결과 1927년 가을 9월경 공사를 시작해 같은 해 11월경 준공했습니다. 운동장을 포함해 부지 약 500평, 교사 10여 칸, 비용은 약 1,500원. 기본금 적립은 없고 인근 각 마을이 해마다 곡물을 모으고 발기인과 유지들이 의연을 내어 경비를 충당한다고 했습니다.
1928년 4월 5일 개학, 학생은 약 50명. 5월 초순에는 낙성식을 거행할 예정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기사 말미의 직원 명단.
| 직명 | 이름 |
|---|---|
| 교장 | 金潤德 |
| 학감 | 金舜兆 |
| 교감 겸 재무 | 林學烈 · 李鉉卨 |
| 교사 | 朴始發 외 1인 |
한 지면 안에 이름이 두 번 있습니다. 발기인이자 교감 겸 재무.
이 기록관은 그동안 이 항목을 “교감 겸 재무로 참여했다”로만 적고 있었습니다. 발기 단계부터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원문을 다시 대조하며 확인해 CLM-006에 반영했습니다.
두 번째 지면 — 1930년 3월 28일
조선일보 1930년 3월 28일자 3면의 묶음 기사 各學校卒業. 기사 ID는 1930032800239203007입니다.
여러 학교의 졸업 소식이 한 줄씩 이어지는 가운데 이 줄이 있습니다.
蒼水東昌學院 同二十五日
앞 항목의 날짜를 이어받는 同 표기이므로 1930년 3월 25일입니다. 학생 수도, 참석자도 적혀 있지 않은 한 줄입니다.
그런데 이 한 줄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학원이 적어도 이날까지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못박습니다. 뒤에서 이 날짜가 중요해집니다. → CLM-021
세 번째 지면 — 1931년 9월 7일
조선일보 1931년 9월 7일자 4면, 五個所公普校에 私立學校가六個, 부제 盈德敎育狀况一瞥. 기사 ID는 1931090700239204010입니다.
영덕군의 교육 형편을 훑은 기사입니다. 인가 문제와 재정난으로 문을 닫은 사립학원을 열거하는 대목에 蒼水朿昌學院이 있습니다.
朿입니다. 東이 아니라.
여기서 우리는 멈췄습니다. 이 기록관은 글자 하나 때문에 판단을 통째로 되돌린 적이 있습니다. 제3화에서 李鉉卨과 李鉉禹를 혼동한 판단을 배제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대 방향의 유혹, 즉 “비슷하니까 같은 것으로 읽자”를 경계해야 했습니다.
세 가지를 확인하고 판단했습니다.
- 앞에 붙은 소재 표기가 蒼水로 같습니다.
- 같은 신문이 1928년과 1930년에 같은 곳의 학교를 東昌으로 적었습니다.
- 朿과 東은 자획이 가까워 활자 지면과 판독 과정 양쪽에서 흔히 섞이는 글자입니다.
그래서 지면 표기의 이체 또는 판독 오류로 판단합니다. 확정이 아니라 판단이라고 적고, 근거를 함께 남깁니다. 판단을 판단이라고 적어 두면 다음 사람이 그것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이 지면 가까이에 인물 초상이 보입니다. 다른 기사에 딸린 사진이며 이 기사나 동창학원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지면상의 인접을 내용상의 관련으로 읽지 않습니다.
폐쇄 시점을 구간으로 적는다
1930년 3월 25일에는 졸업식을 치렀고, 1931년 9월 7일에는 폐쇄된 학원으로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폐쇄는 그 사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구간을 좁혀 놓고 그 안의 아무 날이나 골라 적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폐쇄일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CLM-008의 문장은 구간을 적고 날짜 자리를 비워 둡니다.
네 번째 지면 — 1935년 5월 8일
조선일보 1935년 5월 8일자 6면, 普校基金完納. 기사 ID는 501019350508e10633입니다.
영덕군 안에서 창수면만 보통학교가 완성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설립위원회의 활동으로 창수보통학교 기본금 3,700원을 한 달이 안 되어 완납했고 인가도 머지않으리라는 단신입니다. 흉년으로 초근목피 생활을 하던 면민의 형편에도 불구하고 이룬 결과라고 적혀 있습니다.
| 직명 | 이름 |
|---|---|
| 회장 | 李洛鉉 |
| 부회장 | 李謙浩 |
| 위원 | 李尙□ · 南□鎭 · 李鉉卨 · 權泰鎬 |
□는 지면 훼손으로 판독되지 않은 글자입니다. 추정해 채우지 않습니다. 이 기록관은 훼손을 훼손으로 적습니다.
이 기록관은 그동안 이 항목을 “기금 모금위원”으로 적고 있었습니다. 지면이 적은 것은 설립위원회의 위원이고 기금 완납은 그 위원회의 성과입니다. CLM-007의 문장을 바로잡았습니다.
여기서 갈라진다 — 두 학교
이 대목이 이번 조사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1935년의 이 학교는 창수공립보통학교입니다. 1928년의 동창학교와 다른 학교입니다.
학교의 공식 연혁을 확인했습니다.
| 항목 | 연혁 기재 |
|---|---|
| 설립인가 | 1935년 9월 25일 |
| 개교 | 1935년 10월 8일 |
5월 8일 신문이 “인가도 머지않으리라”고 했고, 연혁의 인가일은 9월 25일입니다. 넉 달 뒤. 두 자료가 같은 사건의 앞뒤를 보고 있습니다. → CLM-028
그리고 이 연혁에는 동창학교를 승계했다는 문구가 없습니다. 학년·학급의 인계도, 교사(校舍)의 인수도, 재산 이전도 읽히지 않습니다.
승계 문구가 없다는 것은 승계가 없었다는 증명이 아닙니다. 뒷받침할 근거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계승관계는 여전히 CLM-009 미확정입니다. 다만 이 기록관은 두 학교를 별개로 취급하고, 이어 부르지 않습니다.
후대 기록과 부딪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창수면지』 484쪽은 점두들 동창학원을 1935년 설립·1938년 폐쇄로 적습니다. 영덕군청 누리집의 『영덕군지』 교육 장도 창수리의 일명 점구(店邱) 동창학원을 1935년 설립·1938년 폐지로 적습니다.
| 자료 | 등급 | 연대 |
|---|---|---|
| DOC-006 조선일보 1928-04-27 | 확정 | 1928년 4월 5일 개학 |
| DOC-013 조선일보 1930-03-28 | 확정 | 1930년 3월 25일 운영 중 |
| DOC-014 조선일보 1931-09-07 | 확정 | 1931년 9월 7일 이전 폐쇄 |
| DOC-030 『창수면지』 484쪽 | 공식 후대기록 | 1935 설립 · 1938 폐쇄 |
| DOC-027 영덕군지 웹 게재본 | 공식 후대기록 | 1935 설립 · 1938 폐지 |
일곱 해가 어긋납니다.
두 편찬물이 같은 연대를 적는다는 사실은 얼핏 교차확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역 편찬물은 서로 참고하는 일이 흔하므로, 같은 연대를 두 번 읽었다고 해서 독립된 확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편 두 편찬물이 적은 초대 원장은 김윤덕(金潤德)이고, 이는 1928년 신문이 적은 동창학교 교장과 같은 이름입니다. 같은 학교를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처리했는가
후대 서술을 확정 연표로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우지도 않습니다.
동시대 신문은 그해에 인쇄된 문서이고, 편찬물은 70년 안팎 뒤에 정리된 서술입니다. 두 계열이 어긋나면 앞의 것을 연표에 올립니다. 그러나 뒤의 것도 하나의 기록이고, 군지를 읽고 이 사이트에 온 사람이 그 문장을 여기서 찾지 못하면 정정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충돌 자체를 하나의 항목으로 만들었습니다. → CLM-027
왜 어긋났는지에 대해서는 세 가지 가설만 적어 두었습니다. 두 학교와 두 연도가 겹쳐 읽혔을 가능성, 폐쇄 뒤 재개원이 있었을 가능성, 어느 한쪽 연도가 부정확할 가능성. 전부 가설이며, 인가·폐쇄 행정문서로 확인해야 합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두 편찬물의 동창학원 대목 어디에도 이현설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기록관은 편찬물을 근거로 그의 관여를 서술하지 않습니다. 그의 1928년 관여를 확정하는 것은 동시대 신문 한 장입니다.
구술로 돌아온다
이제 처음의 문장으로 돌아갑니다.
| 구술의 부분 | 상태 |
|---|---|
| 학교 건립에 관여했다 | 확정 — 1928년 발기인·교감 겸 재무, 1935년 설립위원 |
| 면협의원이 되었다 | 확정 — 1935년 5월 당선자 명단 두 종 |
| 학교를 세우려고 면협의원이 되었다 | 가족 제공정보 — 직접 사료 미확인 |
기억은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 않았습니다. 붙들고 있던 두 개의 사실은 실제로 문서에 있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것은 그 둘을 잇는 인과입니다. 어떤 목적으로 출마했는지를 적어 둔 동시대 문서는 확인되지 않았고, 반증하는 문서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문장만 등급을 낮춰 남깁니다. → CLM-029 · DOC-028
그리고 한 가지를 조심합니다. 구술은 학교와 면협의원을 한 문장에 묶지만, 그가 관여한 학교는 두 곳이고 연도도 둘입니다. 1928년 동창학교는 당선보다 일곱 해 앞서고, 1935년 창수공립보통학교는 당선과 같은 해입니다. 후대 편찬물이 동창학원을 1935년으로 적는다는 점까지 겹치면, 전승 과정에서 두 학교가 하나로 합쳐졌을 가능성이 보입니다.
가능성입니다. 이 기록관은 “1935년에 동창학원을 세웠다”고 적지 않습니다.
사진은 어떻게 되었나
솔직히 말하면, 이번에도 우리가 먼저 기대한 것은 얼굴이었습니다. 학교는 사진을 남기는 곳이니까요.
네 지면 모두 사진이 실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조사는 사진 쪽에도 결과를 남겼습니다. 세 가지 모두 미발견이지만, 미발견도 기록입니다.
- DOC-029 영덕군 사진DB 공개 키워드 검색 — 이현설·동창학원·김윤덕 직접 일치 0건
- DOC-032 창수초등학교 공식 앨범 게시판 — 목록 35쪽·게시물 310건 범위에서 1935~1952년 옛 사진 미발견
- DOC-030 『창수면지』 인명색인의 이현설 항목(208쪽·520쪽) — 텍스트 서술이며 사진은 확인되지 않음
이 결과들은 공개 검색면과 공개 게시판에서 확인한 범위입니다. 기관이 그 자료를 소장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술되지 않았거나 디지털화되지 않은 자료는 검색면에 나타나지 않고, 오래된 사진철은 게시판이 아니라 서고에 있습니다.
한 건은 별도로 등록했습니다. 영덕군 사진DB의 1940년대 「영덕군 국민총력지도자 연성강습회」 단체사진입니다. 약 40명이 함께 찍혀 있고 참석자는 한 사람도 식별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진에 대해 이 기록관이 하지 않는 말을 먼저 적습니다.
- 이현설의 사진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현설이 이 사진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 유력 후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등급은 미확정입니다.
- 이미지를 이 사이트로 옮겨 싣지 않습니다. 권리관계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 제목에 적힌 단체명 하나로 사진 속 인물들의 행위를 추론하지 않습니다.
등록한 이유는 얼굴이 아니라 순서 때문입니다. 원본 소재, 뒷면 명단의 유무, 기증자, 권리관계 — 이 네 가지를 먼저 확인해야 대조를 시작할 수 있고, 그 네 가지를 확인해 볼 대상의 목록에 이 사진이 들어갑니다. → DOC-033
무엇을 바꿨나
- 조선일보 네 지면의 서지를 정밀화했습니다. DOC-006 · DOC-013 · DOC-014 · DOC-007에 기사명·기사 ID·원문 링크를 넣고, 대조에 쓴 비공개 사본의 SHA-256 해시를 기록했습니다. 지면 이미지는 게시하지 않습니다.
- CLM-006을 정정했습니다. ‘교감 겸 재무’에서 ‘설립 발기인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자 교감 겸 재무’로.
- CLM-007을 정정했습니다. ‘기금 모금위원’에서 ‘창수공립보통학교 설립위원회 위원’으로.
- CLM-008을 정정했습니다. ‘1931년 폐쇄 목록에 포함’에서 ‘1930년 3월 25일 이후 늦어도 1931년 9월 7일 이전 폐쇄’로. 정확한 폐쇄일은 비워 두었습니다.
- CLM-021에 ‘적어도 그날까지 운영’을 명시했습니다.
- CLM-027을 기록충돌 항목으로 새로 세웠습니다. 후대 편찬물과 동시대 신문의 연대 불일치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기록합니다.
- CLM-028을 신설했습니다. 창수공립보통학교 1935년 9월 25일 인가·10월 8일 개교.
- CLM-029를 신설했습니다. 유족 구술의 동기 부분. 가족 제공정보.
- 자료 레코드를 넷 추가했습니다. DOC-030 『창수면지』 484쪽, DOC-031 학교 공식 연혁, DOC-032 앨범 게시판 조회, DOC-033 사진DB 단체사진 후보.
- DOC-005의 서지를 정정했습니다. 『창수면지』의 발행연도를 잠정값 2000년에서 2009년 5월 영덕문화원 발행으로 바로잡았습니다. 아홉 해가 밀려 있었습니다.
- PER-001과 생애, 연표, 교육활동, 사진 추적 조사에 반영했습니다.
지금 서 있는 자리
- 이현설 선생의 사진: 미발견
- 이번에 확정된 것: 1928년 동창학교 발기인·교감 겸 재무, 1930년 3월 25일까지 운영, 늦어도 1931년 9월 7일 이전 폐쇄, 1935년 창수공립보통학교 설립위원
- 이번에 분리된 것: 동창학교(1928)와 창수공립보통학교(1935)는 별개의 학교
- 이번에 기록으로 남긴 충돌: 후대 편찬물의 1935년 설립·1938년 폐쇄
- 여전히 미확인: 정확한 폐쇄일, 두 학교의 계승관계, 출마 동기의 인과, 낙성식의 실제 개최 여부
- 새로 연 조사 경로: 인가·폐쇄 행정문서, 학교 소장 개교 초기 사진·학적 자료, 1940년대 단체사진의 원본과 뒷면 명단
이번 화에서 우리가 한 일의 대부분은 더하는 일이 아니라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한 문장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하나로 불리던 학교를 둘로 나누고, 하나로 적히던 연도를 둘로 나눴습니다.
기억은 자주 뭉쳐서 옵니다. 뭉친 것을 조심스럽게 풀어 놓는 일, 그리고 풀어 놓은 조각마다 다른 등급을 붙이는 일. 그것이 이 기록관이 하는 일입니다.
동창학교와 창수공립보통학교에 관한 옛 사진이나 문서를 가지고 계신 분, 1935년 창수면 설립위원회에 이름이 오른 분들의 후손이 계시다면 제보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