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것이 없었다
집에 남은 것은 이름 하나와 몇 개의 날짜였다. 1894년에 태어나 1952년에 돌아가셨다는 것, 만세운동으로 감옥에 다녀오셨다는 것. 사진은 없었다. 전쟁 통에 없어졌다고만 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조사를 시작하면 가장 먼저 부딪히는 유혹이 있다. 어딘가에서 비슷한 이름을 찾아내고, 시기가 맞으니 같은 사람이겠거니 하고 이어 붙이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그럴듯하고, 가족은 그것을 믿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반대 방향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이름이 아니라 번호에서.
번호가 사람을 특정한다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편철에는 1919년 3월 영덕군 창수면 시위 사건이 남아 있다. 1심은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 항소심은 대구복심법원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판결문 자체보다 형사사건부의 사건번호였다.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 형제786호. 이 번호가 판결문과 집행원부, 그리고 개인을 하나로 묶는다.
- DOC-003 형사사건부 형제786호 — 1심과 개인을 연결
- DOC-004 집행원부 건1799, 원장 717쪽 — 항소심 형기의 집행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 번호들이 보증한다. 이 사이트에서 확정
등급을 받은 1919년의 사실들은 전부 이 연결 위에 서 있다.
확정된 세 문장
- 1919년 3월 19일, 신리 주민을 이끌고 창수면 시위에 참가·지휘했다.
- 1919년 6월 5일,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 1919년 9월 30일, 항소심은 원판결을 취소하고 다시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세 문장을 얻는 데 걸린 시간에 비하면 문장은 짧다. 그러나 이 세 문장은 후손의 기억이 아니라 동시대 문서에 적힌 것이고, 우리가 사라진 뒤에도 같은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긋나는 것들
원문을 확인하고 나니 오히려 어긋나는 지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 후대 요약자료 일부는 1심 선고일을 5월 19일로 적는다. 동시대 장부와 다르다.
- 일부 자료는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월로 감형되었다고 쓴다. 판결문·집행원부의 기재와 다르다.
우리는 이 차이를 지우지 않고 각 주장 페이지의 충돌 기록에 남겼다. 어느 쪽이 맞는지
정하는 것보다, 어느 쪽이 무엇에 근거하는지를 밝히는 편이 오래간다.
아직 모르는 것
판결문은 형기를 정할 뿐 감옥 문이 언제 열렸는지 기록하지 않는다. 출옥일은 아직 모른다. 1920년 일반감형령의 적용 대상이었을 가능성은 높지만, 법령이 있다는 것과 한 사람에게 적용되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리고 이 편철들 어디에도 사진은 없었다. 얼굴을 찾는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다음 화에서는 감옥 기록에 사진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가설과, 그 가설이 어디까지 검증되었는지를 쓴다.